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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이야기보따리

태극기의 역사 및 기원과 색상, 건곤감리의 의미는?

by 조지아커어피 2021.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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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는 흰색 바탕에 태극문양과 건곤감리의 4괘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그리고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을 나타내며, 태극 문양은 음(파랑)과 양(빨강)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의 조화로 인해 생명을 얻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표현해낸 것입니다. 4 괘는 음과 양이 서로 변화, 발전하는 모습을 효의 조합으로 구체화한 것이고, 그중 건은 우주만물 중에서 하늘을, 곤은 땅, 감은 물, 이는 불을 각각 상징합니다. 이들 4 괘는 태극을 중심으로 통일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1. 건군 감리

건곤감리의 4 괘는 유교 경전 '주역'의 8괘에서 가져온 것으로 각각의 의미는 아래와 같습니다.

  자연 계절 방위 사덕 가정 오행 의미
하늘 인(측은지심) 정의
여름 의(수오지심) 풍요
  겨울 지(시비지심) 생명력
  가을 예(사양지심) 아들 지혜

※ 4괘 건곤감리는 방위를 기준으로 '건곤리감'이라고도 부르며, 태극기에서는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건 감 곤 리의 순서이다.

 

 

 

2. 태극기의 역사

태극기는 언제부터 사용하게 된 것일까? 과거 1875년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1876년 2월 조일 수호조약(강화도조약)이 강화도에서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체결되었습니다. 당시 일본 측은 "운요호에는 엄연히 일본 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는데, 왜 포격했느냐?"면서 트집을 잡았지만, 당시 조선 측에서 '국기'가 무엇을 뜻하는 알 수 없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서는 국기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1882년 8~9월 박영호가 고종의 명을 받아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일본으로 배를 타고 가던 중 선상에서 태극 문양과 그 둘레에 8괘 대신 건곤감리 4괘를 그려 넣은 '태극·4괘 도안'의 기를 만들었고, 일본 고베 숙사에 도착하자마자 국기를 걸었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여러 곳에서 국기를 썼다는 기록은 있는데, 1876년에서 1882년까지 국기가 필요한 곳에 국기가 걸렸다는 기록이 있고, 1882년 5월 조미조약을 체결할 당시에도 조선의 깃발은 미국 성조기와 같이 계양되었다고 합니다.

 

 

 

3. 최초의 태극기

박영효 태극기

박영효는 1882년 8월 8일 임오군란 직후 3차 수신로 파견되었으며, 당시 선상에서 그린 태극기가 최초의 태극기라고 알려졌고, 1997년 시사 신보가 발견됨에 따라 대중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이후 2004년 미국 해군부 발간 '해양국가들의 깃발'의 존재가 알려지는데, 현재의 태극기처럼 청·적 태극 주위에 4괘를 갖춘 모습의 태극기의 출간일이 7월 19일로 박영효 수신사 파견 전입니다. 따라서, 1882년 5월 조·미 수호조약을 체결할 당시 성조기와 함께 계양되었다는 조선의 국기가 최초의 태극기로 추정됩니다.

 

1882년 5월 조약 당시 미국 측 전권 대사 슈펠트의 '조선 개항 체결사'에는 김홍집의 명을 받은 역관 이응준이 미군 군함 스와 타라호 안에서 국기를 만들었고, 조약 당시 성조기와 함께 펄럭였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후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은 미국 워싱턴 소장 슈펠트 문서 박스에 '한국 조약 항목'에 들어 있는 그림을 발견하고 공개했습니다. 따라서 박영효가 그린 태극기는 이응준의 태극기를 토대로 그렸다고 추정되고, 최초의 태극기는 이응준의 태극기로 판명되었습니다.

 

 

4. 이응준 태극기

이응준 태극기

'시사 신보'

시사 신보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박영효가 최초의 태극기를 도안하고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영효가 태극기를 그린 기록은 있으나, 당시 그렸다는 태극기의 실물이나 그림이 보존되지 않아 태극기의 역사는 단절되어 왔고, 태극기 연구가 송명호 씨가 1997년 8월 8일 동경도립 중앙도서관에서 최초의 태극기 그림과 관련 기사가 게재된 1882년 10월 2일 자 시사 신보를 발견하여 115년 만에 그 실체를 역사의 사실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태극기의 모습은 음방과 양방의 배치가 좌우 대칭되어 있고 모습도 다릅니다.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시사 신보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박영효가 최초의 태극기를 도안하고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시사 신보가 발견됨으로써 최초의 태극기를 창안하고 도안한 사람은 박영효가 아니라 고종황제이며, 고종황제의 명을 받은 이응준이 그린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 운요호 사건: 일본 군함 운요호가 조선 해안을 탐측 연구하기 위해 왔다고 핑계를 대고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투하여, 해안 경비를 서던 조선 수군의 방어적 공격을 받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함포공격을 가하고, 영종진에 상륙하여 조선 수군을 공격하고 인적·물적 피해를 입히고 퇴각한 사건입니다. 그 후 일본은 다시 강화도 앞바다에 무력시위를 하며 나타나, 이 사건에 책임을 조선에 물으며 수교 통상을 할 것을 강요하고, 그 결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 이후 1883년 3월 6일 고종 황제는 태극기를 조선의 정식 국기임을 발표하였습니다. 당시에는 태극기가 아닌 '조선국기'로 불려졌고,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면서 일본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태극기로 부르자고 약속을 하였고, 현재까지 태극기로 불리고 있습니다.

 

"국왕은 분히 여겨 절대로 중국의 국기를 흉내 내지 않겠다고 하여, 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원(두 개의 소용돌이 문양)을 청색과 홍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역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

- 고종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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